한국 이슬람 현황

한국 이슬람 현황

오늘날 한국 무슬림 공동체의 형성에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1950년 한국 전쟁과 무슬림 군인들의 참전이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다국적 군내에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터키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여단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들 무슬림들은 전선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인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고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에 헌신적인 모범을 보였다. 무슬림 군인들의 철저한 규율과 극한 상황에서의 인도적인 대민봉사는 사령부 주위의 많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러한 감명은 이들 무슬림들의 문화와 사상의 바탕이 이슬람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유도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대민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던 터키군 여단 본부에서는 1955년 종군 이후 군 이맘을 통한 부분적인 종교활동을 묵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최초의 한국인을 상대로 선교를 시도한 사람은 제 6터키여단의 군 이맘 압둘 가푸르 카리 이스마일 오울루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 였고, 터키의 삼순, 트라브존 지역에서 이슬람 지역 법관(무프티)을 역임한 명망있는 무슬림이었다. 이러한 터키 군내의 변화와 기존에 만주에서 무슬림이 된 한국인들의 끈질긴 접촉 노력으로 이슬람과 한국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곧 이전 까지의 교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슬람이 하나의 종교와 사상 문화로서 보다도 개별 접촉의 차원에서 진행된 외국 무슬림들의 동화였다고 한다면 그리고 만주에서의 터키계 무슬림들과의 접촉이 일말의 시초였다고 한다면 한국 동란을 계기로 참전한 터키 군인들과의 접촉은 차원을 달리하여 문화와 사상 그리고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터키 군의 한국 전쟁 참여는 당시 무슬림과의 보다 많은 접촉을 갈망하고 있던 한국 무슬림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슬람이 가진 주요한 특성중의 하나인 형제애의 나눔으로서도 그리고 미진한 지식을 보충하기 위한 기회로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금요일 합동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당시 한국 무슬림 중의 한 사람인 김 진규의 터키 군들에게 요청한 내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데 그는 마침 터키 군내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의 사촌 신 백현의 도움으로 한국 무슬림들이 금요일 합동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1953년 말 터키 군의 승낙으로 이루어 지게 되었으며 한국 무슬림들은 처음으로 매주 금요일의 합동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후 단순한 합동예배 참여의 수준은 발전하고 교리 강좌와 이슬람 선교등의 차원으로 발전 마침내 1955년 9월 15일 서울 농협대학 강당에서 신도 70여명이 참여하고 한국에서는 최초로 '한국 이슬람 협회'가 발족되었다. 회장에 김 진규, 부 회장겸 사무국장에 윤 두영씨가 선출되고 한국과 이슬람과의 교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곧 이 협회를 계기로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서 볼 수 있는 것은 협회가 창립된 바로 이듬해 1956년 4월에 문을 연 동 협회 산하 '청진학원'이다. 청진학원은 중학교에 진입하지 못한 불우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무료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 학원의 규모는 3학급 80여명이었으며 이 학생들 중 일부가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초창기 한국 무슬림들의 이러한 활동은 1956년 압둘 가푸르에 이어 역시 터키 무슬림인 쥬베이르 코치의 부임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슬람을 알리는 작업이 활동력을 가지면서 계속되었고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 이슬람 근대사에 최초의 이슬람 성원으로 기록될 임시 성원이 서울 이문동에 막사의 형태로 나마 미나렛(예배 시간이 왔음을 알리는 목적으로 세우는 이슬람 성원에 붙어있는 일종의 첨탑)까지 구비하면서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입교자 수는 208명에 이르렀다.
  1960년 대 들어 한국 무슬림들은 국내에서의 이슬람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해외 이슬람 단체들과의 접촉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한국 무슬림들은 국내의 이슬람 현황을 알리기 위해 이슬람 국가들을 순방하였으며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한국 이슬람의 실태 파악을 위해 직접 내국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 무슬림 최초의 성지 순례자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이슬람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로의 연수 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후 1965년 4월에는 오늘날 한국 무슬림 공동체 기구가 되어있는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의 모태가 되는 '한국 이슬람 중앙 연합회'가 공식 출범하었다. 이 연합회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임시 성원과 사무실을 마련, 국내에서의 이슬람 선교와 해외의 이슬람 단체들과 교류를 위해 힘썼으며, 1967년 3월 문공부로부터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의 설립을 인가받아 한국 무슬림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기구로서 법적 지위를 얻었다.
  한국인들이 이슬람에 귀의하여 무슬림 사회를 만들고 활동하는 소식이 이슬람 세계에 알려지자 많은 이슬람 국가들과 단체들의 한국 무슬림들에 대한 나아가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곧 한국 내에서의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하여 한국이란 한 국가에 대한 아랍 및 이슬람 세계의 이해도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아랍 및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를 한국의 정부도 인식하게 되고 1970년 당시 한국 무슬림들에게는 필연적 사업이었던 이슬람 성원 건립이 박 정희 대통령의 중앙 성원 건립 부지 기증과 함께 현실화되었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에 1500평 규모의 성원 건립 부지가 확보되자 이슬람 세계의 정부와 단체들도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6년 5월 이슬람 국가들의 장관 및 국회의원을 포함한 약 50여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원 개원식이 거행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아랍 건축양식에 의한 돔식 이슬람 성원이 건립되게 되었다.
  이슬람 성원의 건립은 무슬림들의 신앙의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아랍 세계를 알려는 한국인들과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의 무슬림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곳이었고 이를테면 이슬람과 한국 교류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공식적 장소의 수립이라는 의미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할 것이다. 이런 목적은 이 후 한국 이슬람교 중앙 연합회 활동의 지침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슬람 책자 발간등의 이슬람 선교 활동은 물론 아랍어 강좌도 개설함으로서 이슬람 국가들로의 한국인들의 진출에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었다. 한국 무슬림들의 수도 급증하여 개원 전 약 3700명에서 개원 후 3년 내에 1만 5천명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입교한 한국인들의 다수는 충분한 이슬람 지식이나 신앙에서가 아니라 당시의 늘어가는 이슬람 나라들과의 교류로 말미암은 취업, 유학, 결혼, 사업등이 입교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입교한 무슬림들은 실제로 아랍에서의 이슬람에 대한 접근을 통하여 귀국 후에 신실한 무슬림으로 회심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배경으로 1978년 3월에는 중동에 진출한 많은 한국인 근로자들에게 그들이 사는 세계의 종교와 사상 그리고 문화로서 이슬람을 알리기 위해 최초의 해외 지회인 제다 지회가 설립되었다. 중동에 파견된 기술자들의 이슬람에 대한 관심은 제다 지회의 설립과 함께 구체화되어 이슬람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8000여명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또한 1979년 7월에는 쿠웨이트 지회도 설립되어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84년 까지 약 3000명이 무슬림이 되었으며 이러한 이슬람 세계로 진출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자국 문화와 종교를 교육시키는 목적은 인도네시아 지회도 설립할 수 있게 하였다.
  서울의 이슬람 성원의 개원으로 서서히 각 지방에서의 선교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가정집, 비닐 하우스등에 임시 예배실을 마련하고 이슬람을 알리는 노력은 지방에서의 이슬람 성원 건립을 유도하였으며, 외국 무슬림들의 지원으로 1980년 9월 부산 이슬람 성원이 남산동 두실에 개원하고, 이어 1981년 7월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1986년 11월에는 전북 전주에서 이슬람 성원이 개원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외국 무슬림들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개원하기에 이르러 1986년 4월에는 안양의 한 한국인 무슬림이 기독교 교회를 매입하여 이슬람 성원으로 개원하게 되었다. 현재는 울산과 제주에도 임시 예배실이 설치되어 한국과 이슬람과의 교류에 힘쓰고 있으며, 약 4만명의 무슬림들이 있다.    
(압둘 하미드 김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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